| |
‘유명한 의사는 자기 선전을 위해 광화문이나 종로에 나가 떠들어대지 않는다. 다만 찾아오는 환자를 정성껏 치료할 뿐이다.’
70년대 KIST 전자계산실의 예산이야 늘 부족했지만, 나의 경영모토는 정성껏 열심히 일하자는 것이었다. 다만 살아 남기 위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연구에 임했고, 연구원들에게도 “다른 어떤 것도 열심히 일하는 것과 바꿀 수 없다” 라고 말하곤 했다. 바둑을 가끔 두는데 ‘목숨 걸고 둔다..’는 조치훈 기사의 얘기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예산은 물론 양성된 전문인력도 부족했고 70년대 수행하였던 일들 중에는 3D형의 업무도 있었다. 일부에선 3D형의 일보다는 남들이 고상하게 봐주는 기초적인 엔지니어링이나 리서치 쪽에 전념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있었다.
물론 기초연구를 해야 하지만 예산이 없는 상황에서는 연구 개발사업을 하는 연구조직의 간접비로 그 재원을 마련해 스스로 해 나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닭과 달걀 선후를 따질 겨를 없이 어떤 경우는 수요가 공급을, 어떤 때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생각으로 열매를 우리가 따지 못하더라도 이런 일들이 밑거름 되어 정보화시대를 하루라도 앞당기는 일이 중요했다. 정보산업 발전이란 공익을 추구하면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일을 많이 생각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전산화 타당성이 높을 것으로 생각되는 조직체 업무를 연구하고 전산화방안을 마련, 담당자를 만나 전산화를 추진할 것을 설득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처음에는 물가분야를 전산 처리하는 방안을 떠올렸다. 그러나 물가분야 전산화를 할 경우 당시 한 자리 물가라고 주장했던 정부쪽 견해와 다른 결론이 나올 경우에는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어 증권업무 전산화를 추진키로 결정했다.
지금이야 인터넷을 통해 주식을 사고 팔 수 있을 정도로 증권 전산업무가 선진화되었지만 당시 만해도 주식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금액을 제시, 이를 종이에 적어 매매하는 일명 ‘딱딱이 매매’라 불리는 격탁매매 방식이었다. 격탁매매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손가락 표시를 잘못 읽어 나중에 매매자가 정정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과정에서 작전 세력이라 불리는 일부 전문가들에 의해 선의의 주식투자자가 피해를 입는 사례가 속출했다.
일부 작전세력들에게 증권시장을 맡길 게 아니라 국민 편에 서서 증권 데이터를 주무를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실무책임자는 안태백 연구원(현 국민대 교수)이었다. 안 연구원은 증권사에 다니는 친구의 도움을 얻어가며 증권분석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분석프로그램도 개발되고 증권전산업무를 추진하기로 했지만 누구를 만나 전산화의 필요성을 얘기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었다.
안 연구원은 당시 명동에 있던 증권거래소로 불쑥 찾아갔다. 누구를 만나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사전 약속도 없는 상태였다. 안 연구원은 아무 방이나 들어가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을 무작정 찾아 용건을 얘기했다.
“증권 거래소 업무 전산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KIST가 적극 도와 주겠다.”고 말하고 증권 전산과 관련된 외국자료를 제공했다. 안 연구원의 예정에 없는 방문을 받은 큰 책상의 주인공은 서울상대 출신의 박용희 과장(전 부국증권 전무)이었고, 박 과장은 안 연구원의 설명을 이해하는 눈치였다. 상부에 보고한 후 재차 방문해 주면 좋겠다는 약속을 받고 안 연구원은 명동에 있는 증권거래소를 나왔다.
생각보다 빨리 KIST와 증권거래소간 합의가 이뤄져 72년 말부터 본격적인 증권전산 작업이 이뤄졌고 계약은 다소 늦어져 73년 말에 체결, 75년까지 3년 동안 증권업무 전산화가 추진되었다. 3년 동안 작업 끝에 대부분 일의 전산처리가 가능한 단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매매체결 전산화 문제는 쉽게 결말이 나지 않았다. 우리는 컴퓨터가 매매를 체결해 주는 프로그램을 만든 뒤 전산처리를 하자고 제안했다. 컴퓨터 에 의한 매매체결은 당시만 해도 혁명적인 일로 증권거래소를 설득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우회적인 전략을 생각했다. ‘한국의 싱크탱크’로 증권거래소는 물론 재무부 정책에 이론적인 틀을 제공하고 있었던 KDI(한국개발연구원)의 경제학자들을 설득하는 방법을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KDI의 경제학 박사를 찾아가 직접 매매체결의 전산처리를 관철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파격적인 이 제안에 대해 KDI 박사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못했고 매매체결 전산화는 20여 년 뒤에나 이루어졌다.
그러나 증권업무 전산화를 통한 성과 와 변화는 컸다. 손가락신호에 의존하던 격탁 매매 가 사라졌고 당일거래 매매원장, 당일거래 청구서, 보통거래 매매원장, 신용거래 상황 집계 표, 매매 량 집계 등 깨알같은 글씨로 일일이 손으로 작업하던 일들이 모두 전산화되었다. 상장 된 모든 종목에 대해 포스트매매를 추진했고 75년 온라인 시스템화를 위해 증권거래소에 ‘M38 TTY’ 3대와 ‘73 LBST’ 1대가 도입됐고 증권회사와 관련 기관에 ‘M38 TTY’ 1대씩 모두 35대를 도입해 홍능의 KIST 주 컴퓨터 와 연결했다. 이는 한국 증권업계에 도입된 최초의 전산장비였다.
증권업무 전산화 못지 않게 70년대 초반 KIST가 한 일 중에 기억에 남는 일로 최초의 기업업무 전산화를 꼽을 수 있다. 정부 관련 일만 할 게 아니라 민간기업 업무의 컴퓨터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민간기업에도 컴퓨터 마인드를 주입시켜야 사회전체의 전산화가 이뤄질 것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기업 중 하나를 선정해 샘플로 기업업무 전산화가 성공적으로 처리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급선무였다. 기업 전산업무를 수행하면서 나는 한 가지 철학이 있었고 연구원들에게도 끊임없이 기업 전산화에 대한 나의 생각을 얘기했다.
“기업들이 KIST에 용역을 주어 돈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전산화를 훌륭히 추진, KIST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게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철학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