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진행중인 프로젝트 문제는 언제나 내 발을 묶는 요인의 하나였다. 역시 70년대 말의 IBM의 왓슨 연구소에 1년 간 가 있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때도 나로서는 심각하게 수락여부를 놓고 고민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왓슨연구소의 경험은 개인적으로나 국내 정보화에 모두 유익하게 작용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때도 진행중인 프로젝트들이 문제였다. 고민은 “체재 기간을 6개월로 줄여볼까?”로 변질하더니 나중에는 “3개월로 줄이자”로 이어졌다. 결국 나는 왓슨연구소에 갈 수 없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설마 책임자가 몇 달간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이 모두 엉망이 되지는 않을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KIST/SERI의 책임자로 내 모든 시간을 투여하고 있을 때도 나는 사표를 몇 번씩이나 제출해야 했다. “뇌물을 받았다”는 등 말도 안 되는 내용의 투서도 있었다. 이런 판국에 내가 일시적으로라도 자리를 비우면 “프로젝트 수습을 못하니 도망갔다”는 등 별의별 소리가 다 나올 것은 명약관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1년이라면 엄청난 세월이었다. 프로젝트 몇 개쯤 허공에 날려버릴 수도 있는 기간인 것이다.
이렇게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처지이다 보니 나는 KIST 28년 동안 한 번도 년가를 가보지 못했다. 원래 67년 KIST 전산실을 맡으면서 계약조건에 “책임연구원으로 3년 일하면 1년간 유급 안식년(sabbatical leave)을 준다”는 조항을 확인한 바 있다. 내심 무척 좋은 제도라고 생각해 “반드시 챙기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일을 하다보니 1년이라는 기간을 도저히 비울 수가 없었다. 결혼하면서 아내에게 “조만간 해외여행은 시켜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그 후 20년 간 단 한 번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84년에 LA올림픽 전산시스템 조사를 위해 SERI의 연구원 10여 명과 함께 출국할 때, 기를 쓰고 아내를 대동했던 것도 이런 미안함이 내심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진로가 망설여질 때마다 나는 대자연을 움직이는 기본법칙인 ‘최소에너지의 원리’를 생각했다. 즉 주어진 시간과 여건으로 정의사회 구현, 정보화사회 구축에 최대한의 충격 내지 파급효과(Impact)를 줄 수 있는 길이 어느 쪽인가를 생각하면 저절로 가야할 길이 분명해지기 마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