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에게는 생소할지 모르나 풍동(風洞)이라는 설비는 산업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풍동이란 자동차 선박 비행기 로켓 등을 만들고 연구하는데 필수장비다.
예를 들면 항공기 모델을 그 풍동 속에 고정시켜 놓고 비행속도 만큼 바람을 불게 해 양력, 저항력 등을 살펴 설계에 반영하는 것이다. 미국에는 실물 크기의 여객기를 통째로 집어넣고 실험하는 풍동도 있다. 그래서 그 나라 산업수준은 풍동을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세계 각국의 풍동들이 대부분 놀고 있다. ‘수치(數値) 풍동’이란 괴물이 나타나 그 일을 대신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수치 풍동은 한 대에 수 백 억 원씩 하는 슈퍼컴퓨터의 다른 이름이다.
슈퍼컴퓨터는 거대한 풍동 안에서 실험을 한 것과 똑같은 결과를 더 빨리 더 정확히 알려준다. 또 24시간 연중무휴로 돌릴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가. 세계 유수의 풍동들이 개점휴업의 위기에 처할 만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 항공우주연구소의 슈퍼컴퓨터가 초당 1백 60억 번의 계산속도인데 비해 일본 항공우주연구소는 무려 14배나 빠른 2천 3백억 번을 계산하는 슈퍼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최근 초음속전투기와 대륙간탄도탄(ICBM)인 H2로켓의 개발에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얘기다.
H2로켓의 연비(燃比)가 우수한 것은 그저 남의 일이요, 구경거리일지 모른다. 슈퍼컴퓨터가 자동차의 연비향상에도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 이르면 자동차수출 대국을 넘보는 우리도 눈감고 지나칠 수만은 없다.
지금 한창 경기가 좋은 메모리 반도체의 기술우위를 지키는 데도 슈퍼컴퓨터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반도체의 설계과정에서도 그렇지만 그려놓은 반도체를 직접 만들어보지 않고 제대로 작동하는지 알아내는데 슈퍼컴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슈퍼컴퓨터 파워는 65개 대학과 연구소들이 같이 쓰고 있는 대덕연구단지내 시스템공학연구소의 슈퍼컴(미국항공우주연구소와 동일)을 비롯, 기아자동차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광주과기원 등 기업소유의 슈퍼컴을 모두 합쳐도 일본 전체의 40분의 1에 불과하다.
요즘 신문과 텔레비전에 떠들썩한 5천억 원 비자금 소동을 볼 때마다 “그 돈이면 세계 최고 수준의 슈퍼컴센터를 설립하고 국산슈퍼컴개발 19개년 계획을 추진할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동아일보 95. 12)